부모님, 내게는 특히 아버지. 기대하려 하지 않으려고 해도, 존경스러우며, 정말 똑똑한 우리 아버지. 그러나 그런 아버지라도 항상 불안해 하실 것이다. 물론 우리 어머니도 마찬가지이고, 우리의 부모님, 즉 기성세대라고 부르는 모든 사람들이 마찬가지일 것이다. 과연 우리는 잘하고 있는가. 우리가 못했다고 우리를 원망하는 것은 아닐까.
...사실 나는 기성세대에게도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지만, 어쨌거나 어른들 또한 언제나 두려워한다. 그래서 좀 비겁하긴 하지만, 소위 '노오력' 같은 것도, 실은 그런 불안으로부터 나름대로 벗어나는 방법인 것이며, 그들을 경멸하기보다는 가여워해야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나는 투쟁이라는 단어가 참 낡았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또한 삶은 투쟁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어릴때부터 부모님과 크고 작게 다퉜으며, 그덕에 부모님과 나의 영역 사이에는 틈이 있다. 그 틈이란, 서로에 대한 거리감이나 유리감이 아니라 각자 주장하는 바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공간이다. 서로가 양보(포기)한 것들이 쌓여 있는 공간. 딸기의 경우가 아마도 이럴 것이며, 루카는 아마 고분고분하게 살아온 것이 아닐까. 어쩌면 그래서 루카가 당한 아웃팅은, 서로에게 큰 상처를 남긴 것이 아닐까.
루카의 아버지는 적어도 루카에 관해서는 스스로 떳떳하게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자신이 바라는 자식의 이상향에서 벗어나게 된 것을 알게 되자 큰 충격을 받은 것일지도 모른다.
호모포비아인지 아닌지도 물론 중요한 것이지만, 그런 면에서 부모인지 아닌지는 한 차원 위의 요소인 것 같다. 그래서 루카의 아버지는 조금 이나마 '틈'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럼 루카의 연인이었던 딸기는? 부모님이 아니라 연인이었기에 그랬던거야? 라고 물어본다면 사실 이야기가 조금 돌아가게 되는데..
요약해서 말하자면 언제 찾아올 지 모르는 어떤 '계기'가 딸기의 경우에는 늦게 찾아온 것이고(작 중 시점에서는 안 찾아 온 것이지만) 그래서 틈을 만들 새가 없었던 것에 가깝지 않을까? 특히 둘은 평소에 싸우지 않았으니, 더욱 그 경향이 심했을지도 모르겠다.
이 이야기는 이쯤하고, 사실 해설에도 나와있듯이, 윤이형의 루카에서 주목할 점은 사실 그 무엇보다도 무조건적인 약자편이 아니라는 것이다. 표현이 이래서 오해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호모포빅한 소설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딸기로 대변되는 일부 퀴어(소수) 커뮤니티의 한계에 대해서 비판하는 소설이 아닐까 싶은 것이다.
나는 소수, 혹은 약자에 대해 잘 모른다. 분명 언젠가는 소수였고 약자였을 때가 있었을 테지만, 모든 소수, 약자는 저마다의 아픔이 있기 마련이고 그렇기에 그에 대해서 안다고 말하는 것은 오만한 일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그렇기에 내가 볼 수 있는 그들의 모습이 분명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위에서 투쟁이라는 단어를 참 낡았다고 생각한다고 잠시 언급했었다. 투쟁, 싸움은 결국 너(너희)와 나(우리)가 있는 것이고, 하나가 되기 위해 하는 투쟁은, 그러나 끊임없이 너와 나를 되뇌이는 작업이기도 하다. 언제나 어려운 단어, '적당히', '경계'. 딸기는 타협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너와 나는 하나가 될 수 없었다.
무조건 양보하라는 소리가 아니다. 절대 양보할 수 없는 것이 분명 존재하며, 또한 싸우기도 전에 양보부터 하는 놈은 바보다. 오랜 분쟁끝에 서로를 알게되고, 그래서 느낄 수 있는 틈이 분명 있을 것이고, 그 틈에선 하나가 되기 위한 작업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하는데, 그 하나가 되기 위한 작업이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아니, 이루어지고는 있을 것이다. 다만 나는 요새 딸기같은 사람들이 자주 보이는 것 같아서, 조심스레 걱정해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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