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카 2
부모님, 내게는 특히 아버지. 기대하려 하지 않으려고 해도, 존경스러우며, 정말 똑똑한 우리 아버지. 그러나 그런 아버지라도 항상 불안해 하실 것이다. 물론 우리 어머니도 마찬가지이고, 우리의 부모님, 즉 기성세대라고 부르는 모든 사람들이 마찬가지일 것이다. 과연 우리는 잘하고 있는가. 우리가 못했다고 우리를 원망하는 것은 아닐까.

...사실 나는 기성세대에게도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지만, 어쨌거나 어른들 또한 언제나 두려워한다. 그래서 좀 비겁하긴 하지만, 소위 '노오력' 같은 것도, 실은 그런 불안으로부터 나름대로 벗어나는 방법인 것이며, 그들을 경멸하기보다는 가여워해야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나는 투쟁이라는 단어가 참 낡았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또한 삶은 투쟁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어릴때부터 부모님과 크고 작게 다퉜으며, 그덕에 부모님과 나의 영역 사이에는 틈이 있다. 그 틈이란, 서로에 대한 거리감이나 유리감이 아니라 각자 주장하는 바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공간이다. 서로가 양보(포기)한 것들이 쌓여 있는 공간. 딸기의 경우가 아마도 이럴 것이며, 루카는 아마 고분고분하게 살아온 것이 아닐까. 어쩌면 그래서 루카가 당한 아웃팅은, 서로에게 큰 상처를 남긴 것이 아닐까.

루카의 아버지는 적어도 루카에 관해서는 스스로 떳떳하게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자신이 바라는 자식의 이상향에서 벗어나게 된 것을 알게 되자 큰 충격을 받은 것일지도 모른다.

호모포비아인지 아닌지도 물론 중요한 것이지만, 그런 면에서 부모인지 아닌지는 한 차원 위의 요소인 것 같다. 그래서 루카의 아버지는 조금 이나마 '틈'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럼 루카의 연인이었던 딸기는? 부모님이 아니라 연인이었기에 그랬던거야? 라고 물어본다면 사실 이야기가 조금 돌아가게 되는데..

요약해서 말하자면 언제 찾아올 지 모르는 어떤 '계기'가 딸기의 경우에는 늦게 찾아온 것이고(작 중 시점에서는 안 찾아 온 것이지만) 그래서 틈을 만들 새가 없었던 것에 가깝지 않을까? 특히 둘은 평소에 싸우지 않았으니, 더욱 그 경향이 심했을지도 모르겠다.

이 이야기는 이쯤하고, 사실 해설에도 나와있듯이, 윤이형의 루카에서 주목할 점은 사실 그 무엇보다도 무조건적인 약자편이 아니라는 것이다. 표현이 이래서 오해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호모포빅한 소설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딸기로 대변되는 일부 퀴어(소수) 커뮤니티의 한계에 대해서 비판하는 소설이 아닐까 싶은 것이다.

나는 소수, 혹은 약자에 대해 잘 모른다. 분명 언젠가는 소수였고 약자였을 때가 있었을 테지만, 모든 소수, 약자는 저마다의 아픔이 있기 마련이고 그렇기에 그에 대해서 안다고 말하는 것은 오만한 일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그렇기에 내가 볼 수 있는 그들의 모습이 분명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위에서 투쟁이라는 단어를 참 낡았다고 생각한다고 잠시 언급했었다. 투쟁, 싸움은 결국 너(너희)와 나(우리)가 있는 것이고, 하나가 되기 위해 하는 투쟁은, 그러나 끊임없이 너와 나를 되뇌이는 작업이기도 하다. 언제나 어려운 단어, '적당히', '경계'. 딸기는 타협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너와 나는 하나가 될 수 없었다.

무조건 양보하라는 소리가 아니다. 절대 양보할 수 없는 것이 분명 존재하며, 또한 싸우기도 전에 양보부터 하는 놈은 바보다. 오랜 분쟁끝에 서로를 알게되고, 그래서 느낄 수 있는 틈이 분명 있을 것이고, 그 틈에선 하나가 되기 위한 작업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하는데, 그 하나가 되기 위한 작업이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아니, 이루어지고는 있을 것이다. 다만 나는 요새 딸기같은 사람들이 자주 보이는 것 같아서, 조심스레 걱정해보는 것이다.
Posted by 하늘바라KSND
,

양식

카테고리 없음 2016. 1. 30. 03:09
장르(Ex.SF, 판타지, 세기말 아포칼립스 등)

제목

상황 (Ex. ~~가 ~~랑 ~~~해서 ~~~하는 상황)

장소

인물

기타 요청사항
Posted by 하늘바라KSND
,

번역 :  윤성원

출판사 : 문화사상사


 어머니가 읽어보라고 내게 책을 건내주신 지 한 두 달만에 겨우 책을 들어서 읽었던 것 같다. 책 자체는 다행히 부드럽게 술술 넘어가는 책이었다. 그동안 책을 읽지 못한 이유를 들어보라면 바빴다고 변명을 할테지만, 사실 자취방에서 인터넷으로 보낸 헛된 시간을 생각해본다면 내가 가지고 있는 '표지 들기 공포증'이 도진 것일지도 모르겠다.


 먼 북소리는 무리카미 하루키가 86년부터 89년까지 외국에서 살았던 3 년간의 기록이다. 여행이라기보다 말 그대로 '살았던' 기록이다. 그래서 우리가 일반적인 여행기에서 보기 힘든 무거운 깊은 맛이 느껴지는 수필이다. 거기에 약 25년 전이라는 시대적 배경까지 더해져 좀 더 이국적인 냄새가 가득 풍기는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책을 읽으면서 문득 기록에 대한 생각을 했다. 여행을 가거나 좋은 풍경을 보면 우리는 보통 사진 찍을 생각을 하기 마련이다. 그 왜 남는 건 사진이란 말도 있지 않은가. 그런데 사실 생각해보면 우리는 그다지 사진을 찍는 일에 그다지 조예가 없는데도 사진을 찍어간다. 물론 사진이라는 것이 우리가 보는 것을 거의 복사해서 붙여넣기는 하기는 하지만, 그 사진을 본다고 해서, 그 장소에 갔을 때의 감상을 보는 이에게 전달해줄 수 있는가? 선반 위에서 먼지만 쌓이는 기념품처럼, 사진도 하드속에서 조용히 낡아가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사실 전에도 이런 생각을 해서 두 편 정도 수필을 쓴 적이 있긴 했다. 그리고 나서는 험난한(?) 고등학교 생활을 하느라 잊어먹고 말았지만. 어쨌거나 여행을 간다면, 그 기록을 단순히 사진만 왕창찍어서 남기는 것보다 자신이 좋아하는 방식으로 남기는 것이 가장 적절한 것이 아닐까. 글쟁이는 글로, 그림쟁이는 그림으로, 사진쟁이는 사진으로-.


 나는 여행이라고 하면 매우 피곤한 '일'이라는 단어가 먼저 떠오른다. 사실은 밖에 나가기를 싫어하는 성향의 사람인 것이다! 게다가 유적지에 가서 지식을 쌓는 것도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나는 삶의 문화를 느끼는 것이 좀 더 유익하다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과거보단 현재인 것이다. 그래서 여행을 한다면 나도 무라카미 하루키씨가 이 여행에서 했던 것처럼 어디에 살면서 한가하게 주변을 돌아다니는 여행을 하고 싶다-라고는 해도 사실 새로운 환경에 스스로를 던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큰 편이라, 다시 말해 낯선 환경에서 새로운 관계를 맺는 것에 대해서 일찌감치 겁을 먹고 있어서 여행을 하기 위해서는 크게 마음을 먹어야겠지만.


 무라카미 하루키 부부의 여행기를 보면 음악회에 간 부분이 종종 보인다. 그 장면이 인상깊었던 것은, 얼마전에 디씨의 내일은 칸타빌레갤에서 보았던 글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사실 문화생활에 대한 깊이가 없다. 혹은 내가 관심없는 분야라서 그런 것일까? 그러나 그렇다고 하기에는 행정부의 문화-예술에 대한 취급이 영 좋지 않으며 개선하려는 의지조차 없는 것 같다. 어쨌거나 어떤 한 예술 분야에 대해서 이렇게 관심을 가지고 있고 소비할 수 있는 사고가 참 부러웠다.


 그리스의 한 섬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와 호텔 지배인이 나눈 이야기가 인상깊었다. 80년대 후반에서 관광업에 대한 종사자의 시선이 어땠는지에 관해서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각종 산업이 힘들어지자 뜬금없이 관광업을 들고와서는 우리가 먹고 살 길은 관광이다! 하면서 설치는데, 글쎄. 이 책을 읽어봤더라면 과연 그런 소리를 할 수 있을까 싶었다.


 

'감상문 > 본격 감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수어사이드 스쿼드  (0) 2016.12.24
12월 인문학 강좌 - 한국춤의 아름다움  (0) 2016.12.15
김혜나 - 그랑주떼  (0) 2016.11.20
윤이형 - 졸업  (0) 2016.11.20
윤이형 - 루카 2  (0) 2016.02.03
Posted by 하늘바라KSND
,